우리가 그어버린 선
[로마서 15:5–6]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 여러 선을 그어두며 살아갑니다. 관계 속에서 다치지 않기 위해,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혹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무게 때문에 조용히 긋고 지나간 작은 금들이 시간이 흐르며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그 선들은 처음엔 나를 보호하는 울타리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건널 수 없는 경계가 되고, 때로는 내가 스스로 갇혀 버리는 마음의 벽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벽이 얼마나 높아졌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왜 삶이 이렇게 좁아졌는지, 왜 사랑하기가 어려워졌는지, 왜 마음의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마음속에 조용히 그어놓은 선들이 어느새 사랑을 제한하고 관계를 억누르고,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뒤늦게 깨닫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경의 역할을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말씀이 우리의 닫힌 세계를 비추는 창이라고 말합니다. 말씀 앞에 서면 내가 그어놓은 선들은 선명해지고, 그 선 너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신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경계 앞에서 돌아서지 않으시고, 우리가 스스로 넘지 못해 멈춰 선 자리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시며, 다시 건너오라고 부드럽게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은 인간의 의지나 성향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기다림과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선은 두려움에서 나오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 내 삶에서 지워야 할 선은 무엇인가.” 누군가를 향해 마음속 깊이 그어둔 선일 수도 있고, 스스로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긋고 살아온 제한의 선일 수도 있으며, 혹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오래된 두려움의 선일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를 죄책감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더 넓고 깊은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딛게 하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그 선 하나를 지울 때, 그 자리에는 공허가 아니라 새로운 길이 열리고, 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빛이 비추어 들어옵니다. 대림절의 새벽처럼 고요하고 은은한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어, 우리가 그어버린 선 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시기를 바라며 오늘 하루를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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