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기억해야 할 것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역대상 4:9]
신앙은 무엇을 더 많이 아는 데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잊지 않는 데서 깊어집니다.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쉽게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보다 현실이 더 크게 보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보다 실패와 상처가 먼저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하면 믿음도 조금씩 흔들립니다.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문제보다 먼저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시키십니다. 역대상이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는 것도 긴 족보였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지보다, 허물어진 성벽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오래된 이름들의 나열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 하나하나를 통해 언약을 다시 붙들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포로 생활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셨고,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인 그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성전은 무너질 수 있었고 나라는 빼앗길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사람의 정체성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이름이 붙습니다.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인정받는 사람, 부족한 사람이라는 이름들이 마음을 흔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먼저 "너는 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바로 그 음성을 다시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긴 족보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한 사람에게 머물게 하십니다. 그의 이름은 야베스였습니다. 그의 이름에는 '고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출발은 결코 밝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의 시작을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보다 먼저 그의 존재를 바라보셨습니다. 성경은 야베스를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 과거보다 더 크신 은혜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상처를 없었던 일처럼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를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과거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야베스의 이름은 끝내 바뀌지 않았지만 그의 삶은 그 이름에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는 시선이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여러 이름을 마음에 붙이고 살아갑니다. 오래전 들었던 말 한마디, 지워지지 않는 실패의 기억, 남몰래 품고 있는 상처가 어느새 우리의 정체성처럼 자리 잡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누구라 부르시는가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을 때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삶의 가장 깊은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정체성을 마음에 품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야베스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흔적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겼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손을 구했습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이 짧은 기도에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현실을 부정하는 삶이 아니라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오래 바라보는 삶입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삶이 버거울수록 기도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수록 말씀 앞에 머물며, 자신의 힘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이미 주어진 이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은혜로 살아가는 백성이라는 이름, 끝까지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라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잊지 않는 사람은 어떤 현실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께 시선을 올리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삶을 통해 오늘도 조용히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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