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를 내려놓은 믿음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사무엘하 15:25-26]
우리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오면, 숨겨두었던 신앙의 바닥이 숨길 수 없이 그대로 드러나고는 합니다. 삶이 평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누구나 예배를 잘 드리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때 비로소 진짜 의지하고 사랑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선명하게 마주하게 됩니다. 가장 믿었던 아들에게 배신당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비참하게 도망치던 다윗에게, 제사장들이 메고 찾아온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쩌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인생 마지막의 안도감이이자 동아줄이었을지 모릅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캄캄한 광야의 길 위에서 그 거룩한 궤를 내 곁에 쥐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내 편이시다"라는 확실한 명분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자, 흔들리고 흩어진 사람들의 민심을 다시 단번에 모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절박한 순간에 언약궤를 내 뜻대로 붙잡지 않고 거룩한 성읍으로 고스란히 돌려보내는 뜻밖의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내 위기와 두려움을 모면하겠다고 감히 하나님을 나의 방패막이로 삼지 않겠다는 처절한 경외심이었습니다. 당장 목숨이 위태롭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다급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내 목적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 것, 눈앞의 안전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주권을 먼저 인정하는 이 지독히 외롭고 무거운 선택이 다윗이 고통의 길 위에서 증명해 보인 진짜 믿음의 깊이였습니다.
언약궤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다윗의 나지막한 말 속에는 억울함이나 자기를 증명하려는 고집, 혹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전혀 묻어있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뼈아픈 고통과 수치가 남의 탓이 아니라, 과거 자신이 은밀하게 지었던 허물과 죄과에서 비롯된 무거운 현실임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아프게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감히 주님을 향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며 항변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해피엔딩의 결말을 미리 정해두고 가혹하다며 떼쓰지도 않습니다.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라는 이 무거운 고백은, 나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시고 인도해 주셔도 오직 주님의 전적인 은혜요, 혹시 이대로 다 잃고 도망자의 신세로 광야에서 주저앉게 하실지라도 주님의 판단은 언제나 옳고 선하시다는 처절한 순복의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늘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당장의 해결이나 세상적인 성공이라는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그것만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리지만, 다윗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훨씬 더 무겁고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화려한 왕좌를 어떻게든 지켜내는 것보다, 차가운 맨바닥에 홀로 버려질지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바른 영혼으로 서 있는 것이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심하게 요동치고 내 뜻과 계획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면,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내 형편에 끼워 맞춰 하나님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려 들 때가 많습니다. 내 생각대로 상황이 잘 풀리고 평탄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확신하며 기뻐하다가도, 일이 조금만 꼬이고 막히면 나를 홀로 버려두셨다며 쉽게 서운해하고 원망과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진짜 믿음은 눈에 보이는 언약궤가 내 손에 쥐어지지 않아 사방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고 선하시며 내가 주님을 붙잡기 전에 주님이 먼저 나를 강한 손으로 붙들고 계심을 잠잠히 신뢰하는 일입니다.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자리가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평생을 공들여 쌓아 올린 관계들이 신기루처럼 멀어져 갈 때, 내 욕망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내 뜻대로 쥐고 흔들려던 거친 손을 조용히 내려놓아야 함을 오늘 이 다윗의 뒷모습을 보며 깊이 배웁니다. 내 손 안의 언약궤를 내려놓고 앞으로의 모든 결과를 주님의 선하신 판단에 온전히 맡겨드릴 때, 비로소 주변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진짜 하늘의 평안을 마주하게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보장된 안전이 다 사라진 자리에 오직 주님 한 분만 남을지라도, 그 하나님 한 분만으로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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