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을 맡기시는 하나님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열왕기하 2:9下]
열왕기하 2장을 읽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엘리야의 승천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을 조용히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엘리야는 떠날 시간을 알고 있었고, 엘리사는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다시 요단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마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을 마지막까지 다듬어 가시는 시간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그 길에서 특별한 감정도, 많은 설명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다만 엘리사가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기록할 뿐입니다. 그 침묵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서 준비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보다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 더 중요하고, 드러나는 순간보다 드러나지 않는 날들이 한 사람의 믿음을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 과정은 더디고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한 번도 헛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엘리사가 마지막으로 구한 것은 갑절의 영감이었습니다. 그 기도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한편이 조용히 흔들립니다. 그는 엘리야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길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엘리야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길이 얼마나 외롭고 무거운 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언제나 사람들의 이해를 받는 길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삶은 때때로 깊은 침묵과 기다림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는 그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 그 모든 무게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께 무엇을 받는 기도보다 하나님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가 많아집니다. 삶의 형편은 변하고, 맡겨진 역할도 달라지지만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마음은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믿음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고백으로 조금씩 자라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진 뒤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요단강 앞에 홀로 섰지만, 그 자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스승의 이름을 붙들지 않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신앙도 결국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 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의지했던 사람은 언젠가 떠나고, 붙잡고 있던 것들도 하나둘 손에서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세대가 지나가면 또 다른 세대를 부르시고, 한 사람의 걸음을 마치게 하시면 또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어 가십니다. 그 크고 조용한 역사 안에서 우리 역시 잠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직분은 나를 드러내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언젠가는 그 자리도 내려놓게 되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했던 마음만은 다음 사람의 믿음 속에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자리에서 그분보다 앞서지 않고, 그분보다 뒤처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걸음에 조용히 발을 맞추어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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